방어기제

"아니 나는, 기분이 상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친절하니까, 친절하다는 건 좋은 거고요.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 친절 또한 당신의 방어기제라는 건."

"이 친절이 방어기제였구나."

"사람을 잃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당신은. 당신은 하찮은 미물이라도 보듬어주고 이끌고 가려 하고, 그래서 자주 피곤하고 어깨가 무겁고. 내가 더 너그러운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라는 사람도 방어기제로 똘똘 뭉쳐서, 당신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았다 내려놓았다 하는 걸요. 그게 참 미안하죠."

앨리스

"당신은 그녀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 남자애가 너를 좋아하나 봐, 혹은 역시 너는 참 인기가 많구나, 이런 식의 말들. 그 친구는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내게 증명받고 싶어 해."

"음, 나는 무서울 때가 있어요. 그녀의 남자친구가 해줘야 할 몫을 당신이 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 애정을 당신에게 투영하고 보상받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도 그녀에게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건, 정말 그녀 곁에 그런 사람이 당신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 것, 그런 말, 그런 사랑. 남자친구가 해줘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녀를 사랑해주는 일."

면접관

면접관은 후줄근한 폴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의 셔츠엔 어제저녁에 먹었을 반찬 자국이 소매 끝자락에 묻어 있었고, 구깃구깃한 셔츠 깃 사이로 누런 떼가 얼핏 비치었다. 아마도 그는 얼마 전 아내와 이혼했을 것이다. 오랜 기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오던 그의 소중한 셔츠는 빛을 잃었고, 퇴색된 사랑만큼이나 형편없이 낡아가고 있었다. 

그의 책상 오른쪽 앞에는 오래된 자판기에서 막 뽑은 인스턴트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이면지를 재활용한 이력서들이 쌓여 있었고, 그 위로 그의 검은색 모나미 볼펜이 수전증에 걸린 손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자기소개 간단히 해보시죠.'

그의 입 언저리엔 희끄무레한 수염 자국이 나 있었고, 잘 안 드는 면도날에 베인 듯 벌건 상처가 턱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애써 얼굴에 떠오른 측은함을 지웠다. 오늘은 그가 면접관이고, 나는 일개 구직자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면접

사실 그동안 내가 치러왔던 면접들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나흘 밤을 꼬박 새우는 걸로도 부족하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래 오십일곱 번의 면접을 보았고, 그중 서른아홉 번의 면접에서 합격했다. 나는 면접을 취미 삼아 보았고, 그 횟수가 스무 번을 넘겼을 때 면접은 어떤 습관 비슷한 것이 되어 있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면접은 월요일 오전의, 일대일의, 정장을 입는, 서울 도심 지역에서 치러지는 면접이었다. 나는 분주한 서울의 체취를 풍기는 면접관 앞에 앉아 느긋한 커피 향을 풍기는 것을 즐겼다. 그들 앞의 나는 일개 구직자에 불과했지만, 정작 속으로는 월요병에 찌든 그들의 비루한 행색을 비웃고 있었다.

면접은 참 오랜만이었다. 면접관은 피곤한 듯 안경을 고쳐 쓴다. 참 불쌍한 인생이다.

쇄골

그녀는 쇄골이 드러나는 옷을 즐겨 입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헐렁한 라운드 티를 입고 다니는 그녀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그녀의 가슴 위쪽에 자리 잡은 한 쌍의 뼈는 좌우 대칭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는데, 그 사이의 맨살은 내가 가끔 그녀의 시선을 피할 때 잠깐씩 눈길이 향하는 지점이었다. 삼 센티미터의 그 사이가 나는 참 편했고, 그 움푹한 공간에서야 위안받았다.

102

그날의 버스는 유난히도 북적거렸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놓고 나오는 길이었다. 창 밖으론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헐거웠던 대지가 들썩이는 소리가 들렸다. 으레 그렇듯 버스는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102번 버스의 여섯 번째 정류장엔 일곱 명의 학생이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고, 내가 막 여덟 번째 예비 승객이 된 참이었다. 그녀는 바로 내 옆에 서있었다. 그녀는 추적 추적 내리는 비가 싫었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굳게 닫힌 입술이 그 성격을 드러내는 듯 하였다. 그녀는 일곱 번째 승객이었고, 어제는 여섯 번째였을 것이다.

사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직선 거리 칠 점 오 킬로미터, 신호를 피해 천변으로 자전거를 달리면 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나는 매일 그 거리를 오갔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하는 길은, 도시의 실핏줄을 가로지르는 것만 같았다. 팔 차선 대로의 동맥 줄 보다야 하천 옆의 조그만 길이 좋았던 걸지도 몰랐다.

중년

남자는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역시 이번 잔은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메스꺼운 구토감이 치밀어 오를 듯하다 겨우 가라앉는다. 입가를 쓱 닦고 고개를 드니 반대편의 잔 또한 비었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더 마시려고 하는 거예요. 남자는 반대편에 앉은 이에게 핀잔하듯 말을 건넨다. 불콰하게 발개진 중년의 얼굴이 그 말을 받는다. 얼마나? 고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네 머리 위에 올라앉은 빌어먹을 고래 말이야. 남자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쉰다. 역시 이 자리에는 나오는 게 아니었다.

먼지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그녀의 눈언저리에 내려앉았고, 그와 함께 주위의 먼지가 힘껏 비산했다. 갓난아이의 진득한 하품에서 나와 오랫동안 카페의 바닥을 뒹굴던 먼지는 카페 문이 열리며 들어온 바람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흩날리던 먼지가 자리 잡은 곳은 여자의 긴 속눈썹 위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엄마가 물려준 짙은 눈썹은 그날따라 곧게 뻗어 먼지를 내팽개치지 않았다. 먼지는 그 짙고 곧은 눈썹 위로 하강했다. 그녀가 두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는 존재의 목적을 달성할 터였다. 우리는 먼지 하나에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의 티끌만 한 먼지는 나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