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tiempo en Barranquilla sigue su camino, ya que aqui la vida tiene prioridad sobre los minutos
바다는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이십 분, 황량한 들판을 두어 개 지나니 바다가 보였다. 해변의 마을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삶이 특정 지역을 경계로 갈라서는 듯싶었다. 문명의 혜택을 받은 이들과 받지 못한 이들의 삶, 그 차이는 명확한 경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삶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었다. 바로 제멋대로 흐르는 시간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살던 내게 이곳의 시간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니, 종잡을 수 없다기보다는, 시간이 자신에 무책임한 듯 보였다. 시간은 제멋대로 빠르게 혹은 느리게 흘렀고, 오 분과 십 분이 지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간은 자신의 책임을 유기하고, 흘렀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했다. 
열네 시간의 시차가 나는 그곳에서 나는 시간에 휘둘려 살고는 했다. 시간은 일 분 일 초 제 때에 맞춰 흘렀고, 인정머리라곤 하나도 없어 한 순간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그저 앞으로만, 똑바로, 정해진 규칙에 맞춰 흘렀다. 나는 그 시간에 굴복해야 했고, 따라야 했으며, 그것을 지키지 않는 타인을 비판했다. 시간이 일상보다 우선시 되는 삶이었다.
길을 걷다가, 문득 도로가 예뻐 카메라를 들었다. 언덕 저 너머로 푸릇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함께 길을 걷던 그와 그녀는 잠깐 멈춘 나를 뒤로하고 스페인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긴 대화의 사이에서 한 단어 두 단어, 익숙한 단어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바랑키야를 살고 있었다. 분명, 일상이 시간보다 우선시 되는 삶이었다.

#El tiempo en Barranquilla sigue su camino, ya que aqui la vida tiene prioridad sobre los minutos

바다는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이십 분, 황량한 들판을 두어 개 지나니 바다가 보였다. 해변의 마을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삶이 특정 지역을 경계로 갈라서는 듯싶었다. 문명의 혜택을 받은 이들과 받지 못한 이들의 삶, 그 차이는 명확한 경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삶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었다. 바로 제멋대로 흐르는 시간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살던 내게 이곳의 시간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니, 종잡을 수 없다기보다는, 시간이 자신에 무책임한 듯 보였다. 시간은 제멋대로 빠르게 혹은 느리게 흘렀고, 오 분과 십 분이 지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간은 자신의 책임을 유기하고, 흘렀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했다. 

열네 시간의 시차가 나는 그곳에서 나는 시간에 휘둘려 살고는 했다. 시간은 일 분 일 초 제 때에 맞춰 흘렀고, 인정머리라곤 하나도 없어 한 순간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그저 앞으로만, 똑바로, 정해진 규칙에 맞춰 흘렀다. 나는 그 시간에 굴복해야 했고, 따라야 했으며, 그것을 지키지 않는 타인을 비판했다. 시간이 일상보다 우선시 되는 삶이었다.

길을 걷다가, 문득 도로가 예뻐 카메라를 들었다. 언덕 저 너머로 푸릇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함께 길을 걷던 그와 그녀는 잠깐 멈춘 나를 뒤로하고 스페인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긴 대화의 사이에서 한 단어 두 단어, 익숙한 단어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바랑키야를 살고 있었다. 분명, 일상이 시간보다 우선시 되는 삶이었다.

#No hay malas decisiones en nuestra vida. Porque toda decision te hace quien eres
콜롬비아의 밤은 적막하다. 이른 저녁이면 도시가 정적에 잠기고, 희뿌연 가로등 빛 사이로 어둑한 그림자가 들어찬다. 강렬한 태양에 헐거이 옷을 벗었던 대지는 서늘한 밤 공기에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새로운 하루를 준비할 시간이다.
늦은 밤 고요한 도시를 거닐 때면, 그녀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길을 걷다, 멈춰 섰다를 반복하며 이었던 말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내뱉었던 그 단어들은 무척이나 따뜻했고, 생에 대한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읊조리듯 말을 건넸다. 또 다른 하루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인생에 나쁜 결정은 없어요. 그 모든 결정이 나를 만들었으니까요. 내일 죽어도 나는 행복한 생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내 인생은 좋은 기억들로만 가득하니까요.
나는 그녀가 지었던 미소와,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말을 건넬 때마다 지었던 천진한 표정,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던 그의 두툼한 손, 우리가 걸었던 그 어둑한 길을 기억할 것이다. 

#No hay malas decisiones en nuestra vida. Porque toda decision te hace quien eres

콜롬비아의 밤은 적막하다. 이른 저녁이면 도시가 정적에 잠기고, 희뿌연 가로등 빛 사이로 어둑한 그림자가 들어찬다. 강렬한 태양에 헐거이 옷을 벗었던 대지는 서늘한 밤 공기에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새로운 하루를 준비할 시간이다.

늦은 밤 고요한 도시를 거닐 때면, 그녀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길을 걷다, 멈춰 섰다를 반복하며 이었던 말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내뱉었던 그 단어들은 무척이나 따뜻했고, 생에 대한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읊조리듯 말을 건넸다. 또 다른 하루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인생에 나쁜 결정은 없어요. 그 모든 결정이 나를 만들었으니까요. 내일 죽어도 나는 행복한 생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내 인생은 좋은 기억들로만 가득하니까요.

나는 그녀가 지었던 미소와,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말을 건넬 때마다 지었던 천진한 표정,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던 그의 두툼한 손, 우리가 걸었던 그 어둑한 길을 기억할 것이다. 

#La vida está en todas partes, y no hay nada más importante que la vida
모든 곳에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보다 위중한 것은 없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지 삼 일이 흘렀다. 나는 많은 이들을 만났고, 그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공통된 관심사를 찾아가는 여정의 일부였지만, 간혹 우리는 삶에 대해,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삶은 어디에나 있었고, 우리는 다만 그 일상을 공유했을 뿐이다.
나의 세계는 또 다른 누군가의 세계와 만난다. 내가 구축한 견고한 성은 타인의 성을 만나 새로운 지평선을 형성한다. 세계와 세계가 만나고, 나는 스물네 해 동안 고집스레 쌓아온 성을 부순다.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시간이다. 

#La vida está en todas partes, y no hay nada más importante que la vida

모든 곳에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보다 위중한 것은 없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지 삼 일이 흘렀다. 나는 많은 이들을 만났고, 그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공통된 관심사를 찾아가는 여정의 일부였지만, 간혹 우리는 삶에 대해,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삶은 어디에나 있었고, 우리는 다만 그 일상을 공유했을 뿐이다.

나의 세계는 또 다른 누군가의 세계와 만난다. 내가 구축한 견고한 성은 타인의 성을 만나 새로운 지평선을 형성한다. 세계와 세계가 만나고, 나는 스물네 해 동안 고집스레 쌓아온 성을 부순다.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시간이다. 

#El momento en que un mundo y el otro mundo se unen
어제 트위터에 한 줄의 글을 썼어요. 지나친 낙관 뒤에는 언제나 깊은 우울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이 으레 그렇잖아요. 낙관들, 긍정들 사이에 숨어 울고는 하죠. 나는 사실 모든 것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가족, 관계, 일상 그리고 타인에 대한 질투들로부터 말이에요. 하지만 떠난다고 해서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질 수는 없더군요. 이곳에도 삶이 있고, 이곳에서도 똑같은 우울함을 마주해버렸거든요.
왜 떠나려고 했나요?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온전하다면, 그런 것들 따위는 는 당신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할 텐데.
사람들은 모두 결핍을 가지고 태어나요. 내 삶도 그랬죠, 항상 무언가에 쫓겼고, 그 치이는 일상에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곳에서 나는 관계들, 사랑들, 그리고 일상들에 치여 살았죠. 모든 것들이 나를 내몰았어요. 나는 다만 멀리 떠나고 싶었어요. 떠나서 그것들이 제 갈 길을 가게 해주고 싶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뇨, 그곳에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요. 나는 다만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내 삶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깨달았죠, 이곳에 또한 생이 있고, 나는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란 걸.
장소는 사람을 바꾸지 못해요. 나는 다만, 당신의 생각들이, 일이, 당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온전하면 돼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해봐요, 당신은 잘할 수 있을 거에요.

#El momento en que un mundo y el otro mundo se unen

어제 트위터에 한 줄의 글을 썼어요. 지나친 낙관 뒤에는 언제나 깊은 우울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이 으레 그렇잖아요. 낙관들, 긍정들 사이에 숨어 울고는 하죠. 나는 사실 모든 것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가족, 관계, 일상 그리고 타인에 대한 질투들로부터 말이에요. 하지만 떠난다고 해서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질 수는 없더군요. 이곳에도 삶이 있고, 이곳에서도 똑같은 우울함을 마주해버렸거든요.

왜 떠나려고 했나요?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온전하다면, 그런 것들 따위는 는 당신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할 텐데.

사람들은 모두 결핍을 가지고 태어나요. 내 삶도 그랬죠, 항상 무언가에 쫓겼고, 그 치이는 일상에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곳에서 나는 관계들, 사랑들, 그리고 일상들에 치여 살았죠. 모든 것들이 나를 내몰았어요. 나는 다만 멀리 떠나고 싶었어요. 떠나서 그것들이 제 갈 길을 가게 해주고 싶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뇨, 그곳에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요. 나는 다만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내 삶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깨달았죠, 이곳에 또한 생이 있고, 나는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란 걸.

장소는 사람을 바꾸지 못해요. 나는 다만, 당신의 생각들이, 일이, 당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온전하면 돼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해봐요, 당신은 잘할 수 있을 거에요.

예쁜 쓰레기

예쁜 쓰레기라는 말을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잘 알지도 모르겠다.

나와 그녀는 한 달 전부터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녀석은 사고뭉치인 데다가 사람 말도 잘 듣지 않는데, 하는 짓이 워낙 천방지축인지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다. 녀석의 이름은 ‘뭐래’이다. 뭐래, 하고 연애 초기에 그녀가 내게 수없이 건넸던 말들이 녀석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항상 뭐래, 라고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의 처음을 떠올린다. 당신 오늘 정말 예쁜 것 같아. 뭐래, 따위의 오글거렸던 상황들을 떠올리며 말이다. 뭐래는 유난히 사나운 발톱을 가지고 있다. 녀석의 발톱은 고고히 솟아 허공을 가르곤 하는데, 운이 나쁘게 녀석의 손에 닿는 가구들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도약 한 번에 흠집 한 번, 그렇게 우리 집 살림살이가 박살이 나던 어느 날, 그녀가 녀석을 위해 스크래쳐를 하나 장만했다.

스크래쳐는 동그란 원통 모양으로 안에는 빼곡히 골판지가 가득 들어차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동그란 원형의 골판지는 고양이들의 발톱을 감당하기 위해 특수하게 고안되었다고 하는데, 고양이들이 그 안을 뛰놀며 발톱을 사방에 긁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 스크래쳐는 이만 삼천 원짜리 물건이다. 그녀가 편의점에서 다섯 시간을 뼈 빠지게 일하고 이천 원이 비면 벌어올 수 있는 돈, 하루 일당의 절반에 해당하는 그 빨간 원형통은 그녀가 야심 차게 준비한 뭐래를 위한 선물이었다. 스크래쳐가 배송되는 날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뭐래의 발톱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찢기고 뜯어진 가구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고, 그 잔혹한 풍경을 마주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날 의기양양하게 스크래쳐의 포장을 풀었고, 박스에서 나온 스크래쳐는 말 그대로 예쁜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뭐래의 한 줌 관심도 끌지 못하는, 이만 삼천 원짜리 예쁜 쓰레기말이다.

사실 되돌아보건대 예쁜 쓰레기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대상은 그 빨간 스크래쳐가 아니라 뭐래 그 자신일 수도 있겠다. 녀석은 코리안 숏 컷치고는 참 예쁘게 생겼는데, 동물병원에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귀여워하는 걸 아는지 콧대를 드높이곤 했다. 치즈네 치즈, 하며 뭐래를 쓰다듬는 손들을 그녀는 한 껏 만끽했고, 그걸 만끽할 자격이 충분히 된다는 양 미소를 지었다. 사실, 녀석이야말로 천방지축, 예쁘게 생긴 쓰레기임이 분명하다.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며, 자신보다 열등한 물건들 사이에서 군림하며 그것들을 한순간에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녀석의 도약은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게다가, 뭐래는 예쁘게 생겼기만 하지, 예쁜 짓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낮에는 구석에 숨어 체력을 열심히 보충해 놨다가, 밤이면 밤마다 제 주인의 손과 발을 물어뜯고, 할퀴고 얼굴로 도약하는 못된 심성의 소유자인 것이다. 혹시 낮에 놀아주지 않아 나를 괴롭히는가 싶어 낮에 그녀와 놀아주려 하면, 그녀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잠을 청한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면 내 복부를 향해, 혹은 복부에서 얼굴을 향해 겁없는 도약을 시작한다. 그녀야말로 진정 예쁜 쓰레기이다.

예쁜 쓰레기를 두 개나 알고 있는 나는 한편으로는 그 둘을 애지중지하면서도, 그 애틋함이 덧없음을 알고 서글픈 심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예쁘면 무얼 하나, 쓰레인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눈이 가고, 아끼게 되니, 참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앞으로도 늘어날 예쁜 쓰레기들에, 더 예쁘게 커갈 쓰레기의 모습에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 만다.

방어기제

"아니 나는, 기분이 상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친절하니까, 친절하다는 건 좋은 거고요.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 친절 또한 당신의 방어기제라는 건."

"이 친절이 방어기제였구나."

"사람을 잃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당신은. 당신은 하찮은 미물이라도 보듬어주고 이끌고 가려 하고, 그래서 자주 피곤하고 어깨가 무겁고. 내가 더 너그러운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라는 사람도 방어기제로 똘똘 뭉쳐서, 당신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았다 내려놓았다 하는 걸요. 그게 참 미안하죠."

앨리스

"당신은 그녀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 남자애가 너를 좋아하나 봐, 혹은 역시 너는 참 인기가 많구나, 이런 식의 말들. 그 친구는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내게 증명받고 싶어 해."

"음, 나는 무서울 때가 있어요. 그녀의 남자친구가 해줘야 할 몫을 당신이 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 애정을 당신에게 투영하고 보상받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도 그녀에게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건, 정말 그녀 곁에 그런 사람이 당신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 것, 그런 말, 그런 사랑. 남자친구가 해줘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녀를 사랑해주는 일."

면접관

면접관은 후줄근한 폴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의 셔츠엔 어제저녁에 먹었을 반찬 자국이 소매 끝자락에 묻어 있었고, 구깃구깃한 셔츠 깃 사이로 누런 떼가 얼핏 비치었다. 아마도 그는 얼마 전 아내와 이혼했을 것이다. 오랜 기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오던 그의 소중한 셔츠는 빛을 잃었고, 퇴색된 사랑만큼이나 형편없이 낡아가고 있었다. 

그의 책상 오른쪽 앞에는 오래된 자판기에서 막 뽑은 인스턴트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이면지를 재활용한 이력서들이 쌓여 있었고, 그 위로 그의 검은색 모나미 볼펜이 수전증에 걸린 손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자기소개 간단히 해보시죠.'

그의 입 언저리엔 희끄무레한 수염 자국이 나 있었고, 잘 안 드는 면도날에 베인 듯 벌건 상처가 턱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애써 얼굴에 떠오른 측은함을 지웠다. 오늘은 그가 면접관이고, 나는 일개 구직자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면접

사실 그동안 내가 치러왔던 면접들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나흘 밤을 꼬박 새우는 걸로도 부족하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래 오십일곱 번의 면접을 보았고, 그중 서른아홉 번의 면접에서 합격했다. 나는 면접을 취미 삼아 보았고, 그 횟수가 스무 번을 넘겼을 때 면접은 어떤 습관 비슷한 것이 되어 있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면접은 월요일 오전의, 일대일의, 정장을 입는, 서울 도심 지역에서 치러지는 면접이었다. 나는 분주한 서울의 체취를 풍기는 면접관 앞에 앉아 느긋한 커피 향을 풍기는 것을 즐겼다. 그들 앞의 나는 일개 구직자에 불과했지만, 정작 속으로는 월요병에 찌든 그들의 비루한 행색을 비웃고 있었다.

면접은 참 오랜만이었다. 면접관은 피곤한 듯 안경을 고쳐 쓴다. 참 불쌍한 인생이다.

쇄골

그녀는 쇄골이 드러나는 옷을 즐겨 입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헐렁한 라운드 티를 입고 다니는 그녀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그녀의 가슴 위쪽에 자리 잡은 한 쌍의 뼈는 좌우 대칭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는데, 그 사이의 맨살은 내가 가끔 그녀의 시선을 피할 때 잠깐씩 눈길이 향하는 지점이었다. 삼 센티미터의 그 사이가 나는 참 편했고, 그 움푹한 공간에서야 위안받았다.